하늘이 파랗다. 날이 좋다. 꼭 이런 날에 나는 너를 알았던가. 그 날은 쪽빛 휘장이 하늘을 덮을 때까지 그렇게나 눈이 부셨다. 이유는 알고 있었어. 정의할 수 없는 이 마음이 내 세상을 자꾸만 붉게 만든다는 것까지도.
우리 앞길은 늘 그렇듯이 선혈이 낭자할 게 뻔했고, 그 옆을 나만이 오롯이 지키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그냥 하찮은 변명일걸. 너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핑계일 뿐이란 말이야. 너만큼 청명한 존재 옆에 있으면 나는 더욱 느꼈어. 절대 나는 너처럼 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할 테지. 그러니 네 옷에 묻는 피 한 방울이나 되고 싶다고.
나는 항상 인생을 편하게 편하게만 살아왔는데, 이제는 하늘이 유달리 푸르고 해가 유난히 밝을 때면 자꾸 머리가 아프다. 얌전히 속눈썹을 치켜 올리고 나를 바라보는 너를 생각할 때면, 나는. 함광군. 머리가 아팠어. 그 올곧은 눈이 나를 힐난하고 질책할수록 더욱 가슴이 답답했어. 좀 더 원색적인 감정이 나를 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 하면 너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위영, 네 입술이 움직이는 그 순간마다 모든 달과 별이 빛을 잃은 채로 죽었다. 늘 그랬다. 사람에게서 빛이 날 수가 있나. 사람은 빛을 낼 수가 있나. 내가 그랬지. 넌 목석이 아니라 무슨 사찰의 보살이냐고, 아니면 어느 신의 현신이냐고. 진심이었다. 너 때문에 늘 눈이 부시다는 소릴 대놓고 할 용기는 없었거든.
아무튼 그 빛무리 좀 치워 봐, 남잠. 지금이 이런데 너 없을 미래는 얼마나 어두울까. 등불 안에 널 넣으면 모든 밤, 모든 어둠, 모든 순간을 너와 함께할 수 있을까. 실없게만 생각하지 말고 한 번만 고려해 줘. 나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될 수 있을지 알고 싶은데. 너 없이는 못하는 거 알잖아.
저기, 해야. 해야. 너를 봐야 시간이 흘러. 나는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기만 하는구나. 날개 없이 널 보기가 참 힘이 든다. 거기 넌 잘 있냐, 네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내가 존재하냐. 의문을 부음에 실어 보내기엔 너무 잔인한 처사인가, 하하. 위영, 위무선, 이릉노조. 네 안의 내 존재는 불확실한 세 단어 아니겠어.
평생 무언가를 두려워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잃을 것 없는 자는 잃는 두려움조차 잃은 지 오래인데, 왜 너라는 사람에겐 손을 뻗을 때마다 잃을까 두렵지? 맞아. 난 겁쟁이야. 넌 거기 고고하게 있을 거고, 난 여기로 널 끌어당길 자신이 없어. 끌어당기면 당겨와 줄까? 그 이전에, 내가 감히 널 끌어당길 수나 있을까?
결국 너는 나를 잡아먹고 말 거야. 네게 압도당한 나는 형체도 없이 불에 탈 운명이니까. 그냥, 그래. 차라리 나를 네게 주면 괜찮겠지. 아니, 떨어지지 마. 나는 이대로 타서 재가 되고, 너는 그 연기로 숨을 쉬어. 함광군, 오늘은 어디까지 날 집어삼킬래? 그렇게 해서 네 날개가 된다면 너는 꼭 더 높이 떠올라야 해.
위영…. …위영. 위영, 위영.
더 이상 불러 봤자, 아무리 그래 봤자 넌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만해, 그만하고 일어나. 네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게 해 주지 그랬냐고, 원망하고 싶었다. 잊혀질 작정이라도 한 것마냥 넌 왜 자꾸 모른 척만 하다가 이렇게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최소한 내 앞에 멀쩡히 나타나기라도 했어야지, 위영. 위무선.
머리로는 알면서도 계속 이름을 되내이는 건 분명 지울 수 없는 미련의 표상이다. 하여튼 내 길지 않을 인생에서 네 이름 두 자만큼은 질리도록 부르는 중이군.
이제 달을 마주하면 가슴이 지끈거린다. 그리고 이 사실을 너는 평생 모를 것이다. 이 밤마저 동이 틀 때까지 너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너는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불빛 하나 없이 눈을 감으면 대신 네 생각이 켜진다는 것마저도 너는 모를 게 틀림없다. 너는 정말로 내 앞에 나타날 마음이 없을 테니까, 나는 네게 있어 그 정도일 뿐이니까. 어차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저기, 해야. 해야. 너를 봐야 시간이 흘러. 너는 아래로, 아래로 추락한 지가 오래구나. 네 추락에 어떤 의미를 붙여야 할까, 나는 유난히도 네 손을 붙잡지 못했다. 길거리 흔한 이릉노조는 열이 넘어도 너는 도통 찾아 볼 수가 없을 때, 그 절망을 너는 알고 있는가. 그게 내가 널 더 강하게 구속하지 못한 탓이라면, 그 통증을 너는 알고 있는가.
평생 무언가를 두려워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붙잡을 때마다 너는 내 손을 하염없이 놓고 말았다. 다시 나타나면 난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이젠 네가 어디로 갔는지. 위영, 넌 어디에 있어. 이 지독한 무지와 불안, 나를 좀먹는 후회. 그리고 죄책감. 나는 늘 내 삶에 있어 확신을 가졌었다. 이 확신을 너는 처참하게 부숴 버렸다. 나는 너 하나 때문에 확신도 삶도 벗도 모두 잃고 원망하는 법마저 잃어 그저 여기에 있다. 늘 그렇듯이 여기에.
결국 나는 너를 잡아먹고 말 거야. 이대로 내 몸이 타고 나면 그 불씨가 널 가둬 둘 수 있겠지. 내 평생의 벗이라고 생각했고, 나아가 나는 너를 내 평생의……. 위무선, 나는 너를. 그저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다. 네게 나를 바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기는 할까. 이 심장까지 온전히 널 향한 것인데, 이제는 내 곁으로 떠올라 줘.
기억 속에서 널 기억해. 천자소 두 병에 해맑게 웃던 너는 정말 기억에만 남아 있을 셈인지, 너는 어디에 있는지.
잠시만 내 얘기를 들어 줘. 잠깐이면 되잖아, 늘 그래 왔잖아. 바닥까지 떨어진 내가 올라가기에 네 곁은 너무 멀어.
네가 필요해. 다 와 가잖아.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내가 있어. 늘 내가 곁에 있는데, 왜 너는 그조차 허락하지 않아.
대체 언제 어둠 속을 벗어나게 할 거야. 내 곁에 있는 건 밤, 밤, 가없는 밤뿐이야. 네 빛이 날 어둠에 밀어 넣는걸.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남잠, 나 알지. 네 빛을 받는 건 아직도 무서워. 하지만 욕심 좀 부려 봐도 괜찮잖아. 꼭꼭 숨을게, 나를 찾아 줘. 나를 붙잡아 줘. 넌 거기 있어. 늘 옆을 서성이던 건 나였으니까, 이번이라고 다르겠나. 천천히 다가갈게. 너는 단 하나만 약속해.
너를 다시 보면 절대 놓치지 않아. 위영, 널 알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네 곁에 있는 건 오롯이 나뿐이야. 너는 시작만 하면 돼. 기다리는 일은 신물이 날 정도로 잘 하고, 잘하니까. 더 이상 묻지 않을게. 그저 너는 하나만 약속해. 내게서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