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칭 관찰자 시점. 모브가 나옵니다.
◈ 분장 이런 것과 관계가 멉니다.
◈ 2018 할로윈 합작!
“Trick or treat!”
이걸로 벌써 세 번째다. 사탕을 바란다는 얼굴로 서 있는 급우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또 무슨 혼종이냐고. 여기저기 칭칭 감긴 붕대에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이상한 망토. 딱 보기에도 모조임이 티 나는 송곳니. 그러니까 얘는 그거다. 미라 흡혈귀. 이게 뭐야! 고등학생 맞냐?
빨리 사탕을 줘 버리고 반에서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곳곳에 비치된 호박 등이 눈에 보였다. HAPPY HALLOWEEN이라고 적힌 색종이와 리본이 벽에 창문에 덕지덕지 붙어 바람이 불면 나풀거렸다. 아침에 붙인 것 같은데 벌써 절반은 떨어져 바닥에서 나뒹구는 중이다. 이번 주 복도 청소가 난데 말이야. 벌써 아득하다. 이걸 언제 다 치우지?
애초에 할로윈은 외국 명절일 뿐이지 않은가. 괴상한 분장을 하고 무작위로 사람을 찾아가서 사탕을 뜯어낼 뿐인 저속하다면 저속하고 순수하다면 순수한 명절. 그것도 어린이가 해야 순수하지, 고등학생이 같은 고등학생을 뜯는 건 하나도 순수하지 않다. 죄다 충치나 걸려 버려라.
이런 부류의 행사가 다 사탕 기업의 상술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할로윈을 기념하여 며칠 전부터 동네의 모든 마트가 사탕 세일에, 분장 세트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안 봐도 훤하다. 하다못해 우리 학교 매점에서조차 사탕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와중에 나 혼자 이런 말을 하자면 곤란해지므로 내 주머니에도 매점 사탕이 몇 개 들어가 있긴 하지만, 정말이지 이건 좀 짜증 나는 일이다. 내가 먹지 못할 사탕을 내 돈으로 사는 것도 억울한 마당에, 혈기 왕성한 내 친구들은 사탕을 받고도 장난을 친다. 말이 장난이지 의자 빼기나 계단에서 밀치기 같은 건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 불쌍한 녀석들에게 관심과 사탕을 베푸는 자선 사업가가 된 거라고 치자. 최소한 사탕을 먹었으면 사탕 껍질은 쓰레기통에 버리란 말이다. 이 바닥을 보라고……! 하여튼 초등학교 안 나온 사람들 참 많다.
어디든 좋으니 내 친구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정처 없이 걷다 보니 D반 앞이었다. 맙소사, 저 반은 진짜 아닌데. 가만히 있어도 튀는 녀석들 천지인데 그 녀석들한테 붙잡히면 단순한 사탕 한 개, 장난 한 번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촉이 강하게 왔다. 그러니 하나라도 만나기 전에 나는 어서 이 자리를 떠야겠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D반 문패가 적당히 멀어졌을 즈음 몸을 돌려 똑바로 걸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몸을 돌렸다. 동시에 발이 무언가에 걸리는 기분이 들고, 몸은 이미 앞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이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안녕, 세상. 쿠당탕거리는 큰 소리가 이어졌다.
끄응. 내 등. 아픈 데다 무엇보다 기이한 자세로 넘어진 게 수치스러워서 괜히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왠지 바닥이 따뜻하고 물컹하다.
“내…려…와…….”
당황한 내 밑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올라왔다. 내려오는 것 말고 내게 달리 남은 선택지가 있을까? 아픈 척을 그만두고 고무 공 튀듯 일어났다.
내가 누워 있던 자리는 바닥이 아니라 무려 선도부장의 배 위였다. 이런, 하필 넘어져도 얘랑. 떨떠름함과 미안함의 사이 그 무언가를 느끼며 강우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죽일 듯이’ 노려보고 나서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나는 내 죄를 알기 때문에 소심하게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강우빈에 대해 지극히 단편적인 사실밖에 알지 못한다. 능력 좋은 선도부장이라든가, D반의 튀는 애들로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라든가, 원칙주의라든가(우리는 히스테릭하다고 말하는 그것이다). 그래서, 맞다. 지금 나는 좀 쫄았다.
그래도 아예 변명거리가 없진 않다. 이런 데서 안 보이게 있던 강우빈도 한 2할 정도의 잘못은 있지 않나? 물론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소리는 아니다. 키 작다고 뭐라 하는 것도 이 나이 먹고 웃긴 일이다. 얘가 작고 싶어서 작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애당초 논리로 무장한 똑똑이에게서 말로 이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는 썩 말발이 좋지 못하다. 그리고 강우빈은 적어도 우리 학교 교칙에 대해서만큼은 빠삭한 지식을 보유한 똑똑이다.
똑똑이 강우빈이 제 옷을 다 털고 말했다.
“괜찮나?”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바로 벌점이라고 할 줄 알았더니. 놀란 표정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그가 쭈그려 앉았다.
“그래. 괜찮다니 앉아라.”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나는 죄인이다. 고분고분히 앉았다.
강우빈이 시작한 것은 줍기였다. 쪼그려 앉아 그 광경을 멍하게 보고 있으니 금방 호통이 날아왔다.
“뭘 보고만 있냐? 너도 주워!”
엥, 나도? 나는 지금 필시 멍청한 표정일 테다. 그런 표정으로 내가 왜 주워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바닥을 가리켰다. 그래, 쓰레기 많은 건 나도 보이는데…….
“다 주워 놓았더니 네놈이 와서 넘어진 탓에 도로 떨어졌잖아.”
그런 이야기라면 내가 안 주울 수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곧바로 그를 따라 비닐을 줍기 시작했다.
비닐을 조금 주웠을 때였다.
“너는 분장하지 않는 건가?”
뜻밖의 질문에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다시금 의외라는 시선을 보냈다. 강우빈은 나를 보지 않고 여전히 줍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뭐, 나까지 동참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내 생각을 그대로 전달했다. 다들 분장하는 마당에 나까지 분장을 하면 사탕을 누가 주겠냐고.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설득력 있군……. 하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사탕을 줄 사람으로 선생님들도 계시지 않나? 굳이 네가 사탕을 줄 필요는 없을 텐데?”
글쎄, 그건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인데. 나는 음 하고 적당히 대꾸했다. 특별히 분장하고 싶은 캐릭터가 없고, 분장한 채로 사람을 골리고 다니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고 말이다. 강우빈은 짧게 “그렇군.”하고 대답했다.
얘기한다고 잠시 멈췄던 내 손에 반해 그의 손은 쉬지 않고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강우빈의 질문을 그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색종이를 주우며 그대로 물어봤다. 물론 오글거려서 말투는 따라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이쪽의 쓰레기를 다 줍고 일어나 한구석에 세워진 쓰레기봉투에 넣는 중이었다. 나도 따라 일어나 손바닥에 놓인 종이와 비닐들을 봉투에 넣었다. 강우빈이 비닐을 들고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기도 했고 앞서 말했듯이 나는 죄인인 데다 강우빈의 명령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탓에 나는 그를 쫄래쫄래 뒤따라 다음 구역으로 향했다.
그는 몇 걸음 먼저 가서 봉투를 내려놓고 입을 열려다 말았다. 혹시 계속 답할 타이밍은 못 잡은 건가? 그렇다면 한 번 더 물어보면 될 일이다. 똑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그러니 그가 모른 척 대꾸했다.
“네가 말했던 그 이유랑 크게 다르진 않다. 내가 사탕을 받으러 다니면 학교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을 테지.”
모른 척하길래 나도 모른 척했지만 강우빈은 대답할 수 있음에 안도하는 듯했다. 그가 이런 면도 있었나 싶어 왠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럼 원래는 사람처럼 느끼지 않았었나? 그건…… 노코멘트. 어쨌든 역시 사람은 보이는 것과 다른 법이다.
나는 그의 대답이 과연 강우빈다운 생각이라고 긍정해 주고 쓰레기를 주웠다. 이제 이건 자연스럽게 내 일이 된 모양이다. 어차피 일하는 걸 꺼리는 성격도, 별 상관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한참을 강우빈과 다니며 서로 말없이 쓰레기를 줍고 다른 곳으로 옮기고 줍고 옮기고 했다. 이 정도 했으면 끝이 날 법도 한데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쓰레기는 줄지 않았다. 허리가 아프다. 할로윈이 이렇게 지저분한 날이었나…?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런 회의가 드는 건 인간이라면 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강우빈에게 나는 이제 그만하리라고 통보하자 그가 일어섰다. 그때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만하면 그를 넘어트린 죗값은 다 치렀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강우빈이 한 일은 일어서서 내 곁에 와 쓰레기봉투를 내려놓은 것뿐이었다.
“수고했다. 갑작스럽게 시켰는데 불평도 안 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의 말에 괜히 머쓱해져서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겸손이 아니라 진짜 1도 없다. 내가 다니면서 주운 쓰레기양이라고 해 봤자 강우빈이 주운 것에 비하면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거다) 듣는 칭찬은 조금 가슴을 찔렀다.
나는 강우빈에게 너는 계속 치우고 다닐 거냐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나도 이것들 버리고 기숙사나 도서관에 갈 예정이다만.”
같이 가 줄까? 물어보니 다시 그의 고개가 가로로 움직였다.
“아니.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해야지. 그보다….”
말을 하다 말고, 강우빈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조금 뒤 주머니의 내용물을 쥔 그의 손이 내 앞에 당도했다. 얼결에 나도 손을 들어 그것을 받았다. 사탕이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그를 보았다. 의도치 않게 강우빈이 씩 웃는 걸 보게 되었다.
“할로윈 기념 보상이다. 이런 날이야말로 너 같은 녀석들이 사탕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아, 이건 솔직히 말해서 좀 감동. 인정해야겠다. 이건 감동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사탕을 쥐며 그에게 고맙다고 전했다. 그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케빈한테서 압수한 거니까 감사는 그쪽에 전하도록.”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아무 대답도 않고 상황 파악을 못 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그는 내 반응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다고 판단한 듯했다. 강우빈이 금방 덧붙여 말했다.
“나한테 협박을 하잖아. Trick or treat이라고. 그래서 Trick no treat이라고 갚아준 것뿐이야.”
뭐라고 해야 할까……. 강우빈답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말이었다. 사탕을 받은 시점에서부터 나는 그에게 적어도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므로 이 말은 일단 칭찬에 가깝다. 게다가 왠지 좋은 표현을 하나 배운 기분이었다. 괴롭히면 사탕은 없다니, 역시 똑똑한 녀석은 농담도 똑똑하게 한다고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곧 사라졌다. 아마 진담이었을 것이다. 그보다 나는 왜 Trick or treat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이게 협박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익숙한 것의 무서움? 잘 모르겠다.
강우빈의 말이 꽤 인상 깊어서 곱씹고 있는데 그가 눈을 굴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역시 이상한가?”
주어가 없었지만, 충분히 주어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런 사고방식이 이상하냐고 물으면 글쎄, 확실히 보통의 반응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게 그만의 진지한 재치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오히려 좀 괜찮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고 말했다. 다시 그가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행이군.”
누가 그에게 이상하다고 한 모양이지. 그것도 갑자기 궁금해져서 질문했더니 강우빈이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송현우랑 빈진호가 그렇게 말하길래 그냥……, 음, 확인차.”
아까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강우빈은 사실 주변의 눈치를 정말 많이 살피는 타입인가 보다. 하긴 평소 하는 일도 남들을 주시하는 일일 테고, 그게 습관인 건지 성격인 건지는 모르겠으나…… 뭐, 나하고는 상관없나.
강우빈은 마지막으로 내게 남은 할로윈 즐겁게 보내라고 말한 후 쓰레기봉투를 들고 멀어졌다. 나는 딱히 갈 데가 없어서 잠시 그곳에 선 채로 그가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드라큘라 백작으로 변장한 케빈이 강우빈에게 다가가 등을 탁 치고는 무어라 얘기하는 모습(언뜻 들렸는데 자신의 사탕을 내놓으라는 것 같았다. 미안하게도 그 사탕은 지금 내 주머니에 있다). 케빈과 함께 있던, 프랑켄슈타인으로 분장한 남선지가 강우빈 주위를 돌며 방방 뛰는 모습. 그런 것들을 보다가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 내 반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D반 근처였구나.
주머니 안의 사탕을 상기하니 왠지 보람차고 도덕적인, 특별한 할로윈이 된 것 같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나는 한동안 선도부장에게 적지 않은 유대감을 느끼게 될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