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디(@Didy_O3O)님의 생일을 축하드리는 축전입니다.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길 바라요!
◈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제 취향이 좀 많이 들어갔습니다.
◈ 리맨물 AU. 원작의 좀비 사태와는 무관합니다.
◈ 캐붕, 폭력 요소, 욕설 有. 유의해 주세요.
밤 10시,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나고도 남은 시간. 연빈은 컴퓨터의 메신저 창을 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흰 채팅창 목록에 NEW가 떠 있는 건 조예지뿐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오늘 약속은 비워 두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으니, 비우는 수밖에 없었다.
[회사 생활은 좀 어때? 상상하던 거랑 같아?]
[씹니?]
오후 09:46에 하나, 오후 09:58에 또 하나였다. 확인하면 어련히 대답하겠지, 하여간 성질도 더러워. 연빈은 혀를 차며 자판을 두드렸다.
[방금 봤거든]
푸른 채팅창 화면을 끄지는 않았다. 설마, 설마 자신이 잔업 때문에 이 회사에 남게 될 줄은 예상도 못했지만 잔업을 이유로 남는다 해도 정말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회사는 아버지의 기업이었고 연빈 자신은 세간에서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다. 철 없던 학생 때의 목표는 그 이름에 걸맞게도 ‘졸업 전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었으나 19살 정도부터 여전히 정정한 제 부모를 보며 점차 그 목표는 수정되어 지금은 ‘가족 회사에서 대충 일하다 녹만 먹는 임원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회사 상속? 제게 차례나 오면 다행이지. 연빈은 자신보다 예지가 그 자리에 훨씬 적합하다는 걸 이미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성정도 잘 알았다. 괜히 덤볐다가 척이나 지게 되면 후에 제 미래가 어찌 될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쨌든, 결론을 말하자면 오늘의 이 잔업은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는 것.
예지의 말풍선이 때마침 갱신되었다.
[네가? 별일이네]
[상사 눈치라도 봐?]
예지는 자주 촉이 좋았다. 연빈은 예지의 그런 점이 꺼림칙했다. “내가 언제나 너보다 한 수 위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내가 눈치를 보겠냐? 생각하고 말해]
[그럼 왜 이렇게 답이 느려? 찔렸구나 너]
[아니 좀 아니라고]
[그럼 아버지 눈치겠지. 네가 눈치 보는 사람이 많진 않잖아]
“젠장.”
연빈은 메신저를 껐다. …물론 1이 사라진 직후였기 때문에 읽씹이 되지 않도록 [게임하러 간다] 하고 한 마디 하기는 했다. 모니터의 우측 하단에서 예지의 메세지가 단편적으로 올라왔다.
[게임? 게이임? 얘가 진짜 미쳤구나; 회사에서 게…]
임을 한다고? 아버지께 다 말씀드릴 거야, 각오해. 겠지. 그는 혀를 차고 크롬을 열었다. 그녀 말대로 게임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상식이 없다고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을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간만에 서치나 좀 할 생각이었다. 연빈의 연락창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은 대부분 뉴스로 손쉽게 볼 수 있었고 연빈은 종종 그걸 즐겼다.
달칵, 달칵. 마우스 소리가 텅 빈 사무실을 울렸다.
“하─, 이 자식 좀 보게. 며칠 전 잘나간다고 라스베이거스 사진 보내더니 마약으로 잡힐 줄 알았다. 이 여자는 결국 다른 기업 차남한테 시집을 갔고…, 뭐, 내 알 바 아니지. 차남급인 주제에 어디서 나한테 대시야. 조 회장, 조 회장. 아버지도 참 대단하셔.”
“무엇이요.”
“미친, 아니.”
분명 여기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을 텐데…! 연빈은 귓가에서 들린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뒤로 뺐다. 전혀 인기척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인간이 말을 할 리가 없는데. 정작 연빈을 놀라게 한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연빈은 자신이 둔한 건지 제 상사가 조용한 건지 잠시 생각하다가 곧 자신이 둔할 리 없다고 합리화했다. 그래, 놈이 이상한 거지.
정동석.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는 대쪽같은 인간. 학벌도 좋다던 사람이 왜 여기 와서 잘난 척이나 하고 지랄인지 모르겠는 인간. 그에 대한 연빈의 인상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연빈을 향한 동석의 인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석은 한 눈에 봐도 딴 짓 중이었다는 걸 알리는 듯한 모니터 화면과 당황과 창피로 범벅된 연빈의 표정을 불만스레 내려다봤다. 연빈은, 처음에는 그와 눈을 똑바로 맞추려 했으나 종국에는 결국 눈을 굴려 다른 곳을 응시해야 했다. 동석의 눈은 심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예지라면 제대로 마주했겠지. 그는 열등감에 입술을 깨물고 겨우 목소리를 냈다.
“왜, 무슨 말이라도 하지 그래?”
“…….”
“무섭냐? 하긴, 무섭겠지. 내가 말 한 번 잘못 놀리면 넌 그대로 모가지니까. 그런데 그 눈은 뭐냐? 빨리 안 돌려? 이제 하다하다 안 돼서 이런 잡배까지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말이지. 내가 아주 우스워, 어?”
“…….”
“확 씨, 그만 좀 보라고! 뭐! 내가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거 진짜 또라이 아냐?”
동석은 끝까지 말이 없었다. 그의 반응에 화가 돋궈진 연빈만 말려든 기분이었다. 그저 동석은 연빈을 빤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끝없는 관찰, 거기에서 드는 의구심. 연빈은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아 책상을 쾅 내리쳤다. 비록 동석의 반응은 눈썹을 움찔거린 게 다였지만 거기에서나마 연빈은 그가 사람이라는 걸 인지할 수 있어 내심 안심했다.
“아, 됐고…. 마저 보게 가라, 좀.”
훠이훠이, 연빈은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다면 더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회사에서는 누굴 때리거나 괴롭히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동석은 연빈이 굳이 기를 쓰지 않아도 모두에게 목소리 한 올 들려 주지 않는 사내였다. 회의할 때도 모든 걸 PPT에 담아 발표했고, 보고할 때도 극소의 정보만을 입으로 전달했으며, 지시할 때는 손가락을 애용했다.
지금처럼. 연빈은 제 서류를 톡톡 건드리는 동석의 손가락을 어이 없이 바라봤다.
“뭐하자는 거지?”
“…….”
“…허─.”
이 새끼 진짜 머리에 든 게 없네. 연빈은 자꾸만 좁아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참자, 참자. 어른은 인내가 미덕이라고 했
기는 개뿔. 감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못 참지.
“버러지 같은 게.”
연빈은 동석의 무릎을 강하게 차고 의자 채로 몸을 돌렸다. 동석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을 휘청였다. 자못 놀란 눈이었다. 그 모습이 누가 상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도록 했는데 연빈, 그가 살아온 방식이 여태 이런 걸 어쩌겠는가. 연빈은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편하게 기댔다. 싸구려 의자, 전혀 안 편하다.
“동석 씨. 눈이 너무 공격적이다, 안 그래? 아주 내 목을 조르기라도 하겠어.”
“…….”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안다는 그 눈빛이.”
조예지랑 닮아서. 연빈은 이를 조용히 갈았다. 까득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동석의 배에 연빈의 발이 꽂혔다. 쿨럭. 동석은 기침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어차피 내 밑에서 일할 건데 제발 내 심기 거슬리게 하지 말라고. 아─ 정말,”
“못 봐 주겠네.”
“무슨, 큭.”
연빈은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동석이 그의 멱을 잡는 것이 더 빨랐다. 전세 역전이라면 이런 걸 두고 하는 건지도 모르지. 동석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것이, 연빈을, 두렵게 했다. 오싹할 정도의 강렬함. 하지만 연빈의 두려움은 그 강렬함보다도 강렬함의 출처가 불분명한 것에서 왔다. 동석이 미소지은 탓이었다.
“웃…어…?”
“…….”
다시 동석은 말을 아꼈다.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가늠해 본 방향은 감시 카메라, 아니면 시계인데. 감시 카메라! 연빈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경비원이 혹여 이런 꼴을 보기라도 하면, 누가 지나가다 보기라도 하면 제 체면이 영 말이 아닐 것이다. 한낱 월급쟁이에게 멱살이나 잡힌 꼬라지란 얼마나 한심한지!
동석은 연빈의 그 심정을 잘 포착한 모양이었다. 동석은 연빈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연빈의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 그것이 동석은 그저 웃기기만 했다. 긴장했다니, 천하의 조연빈이.
“연빈 씨. 아니면 조연빈이라는 호칭을 원합니까?”
정중한 어조에 도발적인 목소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동석의 표정은 몹시 고요했다. 연빈은 그가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났다면 무엇에 어디부터 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동석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조용히 그 자신의 손목 시계를 봤고 연빈의 머릿속은 이미 혼란스러웠다.
“이, 일단 이건 놓고,”
“…그건 좀 싫은데.”
“놓고 말해!”
“까닭도 없이 얻어맞은 내 무릎과 배가 아직 아파서.”
“놓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글쎄, 후회하게 되는 건 그쪽 아닌가? 이대로 복도에 나가 줘?”
정말 이 남자에게는 도대체 몇 개의 목소리가 있는 거지? 연빈은 돌연 서늘해진 음성에 몸을 떨었다. 크게 뜬 눈으로 다급히 동석의 눈을 응시했지만 여전히 감정은 볼 수 없었다. 아니, 해석할 수 없었다. 연빈은 제 무력함에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귀한 몸을 손상시키면 안 되지, 조연빈.”
“……으, 븝”
“여차하면 내 손가락도 물어 버리고, 잘하는 거잖아.”
연빈의 입술 위에 동석의 손가락이 닿았다. 손가락은 깨물어 닫힌 입을 강제로 열고 억지로 그 안을 헤집었다.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연빈은 불쾌함과 여러 가지로 범벅된 기분에 동석의 말대로 그 손가락을 강하게 물었다. 피가 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쯤 비릿한 맛이 미각중추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석의 손가락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쪽에게만 살짝 말해 주도록 하죠.”
“…….”
“난 야생마를 길들이는 게 좋습니다. 아주 피곤하고 아주 귀찮은 일이지만, 마음에 드는 걸 함락시킬 때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넌 당연히 알겠지, 조연빈. 날 이해할 거야.”
“이해 아… 해!”
이해 안 해. 못 해. 그런 사이코적인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어. 혀가 짓눌린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동석이 조용히 연빈을 보았다. 연빈은 다시 다리가 후들거리는 본능적인 감정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동석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미약한 숨소리가 그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물면 좀 짜증날 것 같아.”
손가락은 빠졌다. 그러나 이어 물컹하고 미지근한 것이 연빈의 입에 닿았다. 연빈의 머리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 과부하 상태였다. 물론 자신이 먼저 시작하긴 했지만 정작 스스로가 성추행을 당하다니 이럴 수는 없다. 인정할 수 없었다.
“윽, 으흡. 읍─.”
입술이 끝이 아니었다. 혀까지 농락 당하고 있다. 연빈은 남자로서의, 조연빈으로서의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동석을 밀어도 보고 때려도 보고 발을 밟아도 봤다. 동석은 끝내 연빈의 멱살을 놓지 않았다. 도리어 한 손으로 연빈의 양손을 붙잡아 더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연빈은 이런 자세로 이런 남성에게 이런 식의 키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동석이 떨어졌을 때, 연빈은 상실감으로 얼룩진 눈물을, 눈물을 떨궜다.
“흑, 윽……. 나, 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뭐냐고…!”
연빈은 동석에게 차라리 그 눈물이 효과가 없었으면 했다. 아주 나쁜 쓰레기에게 걸려서 인정에 호소하지 않은 채 그렇게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울고 싶지 않은 건 여전했고 그걸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여전했기 때문에 연빈은 동석이 제게 폭력을 휘두르길 바랐다.
동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리를 벌리고, 조금 확장된 눈으로 연빈과 마주했다. 씨발. 연빈은 작게 중얼거렸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연빈은 마침내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지막 자존심이 사라졌다.
“내가 때려서 그래?”
“…….”
“내가 짜증나게 굴어서 그래?”
“…….”
“그럼 뭐야. 뭐냐고. 뭔데!”
“…….”
“대답 좀 하라고!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이유를 붙이란 말이야… 씨발 새끼야…….”
연빈의 머리가 손으로 덮였다. 끝까지 나쁜 자식. 쓰레기 자식. 연빈은 입에 담지 못한 채 속으로 자신이 문드러질 때까지 동석을 욕했다. 머리가 아팠다. 이유라도 말해 주던가, 마지막 손길이 상냥하지 말던가, 억지로 키스하지 말던가. 왜 이렇게 나를 집요하게 죽여 버리는데.
“이유가 꼭 필요한가?”
제기랄, 소시오패스 놈. 그걸 말이라고. 연빈은 제 머리 위에 올라왔던 동석의 손을 쳐냈다. 동석의 한숨이 들렸다. 자신을 안는 온기도 느껴졌다. 쳐내려고 했으나 차마 자신이 쳐낼 수 없을 정도로 동석은 강하고 간절하게 그를 안아왔다.
“떨어져, 개새끼야!”
“말했잖아, 조연빈. 이유 말했잖아.”
귀에 페티쉬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왼쪽, 오른쪽 귀를 번갈아 공격할 리가 없다. 연빈은 끝내 자신을 울린 사내에게 기대었다. 이건 굴욕이다. 처참한 패배감, 모멸감.
동석이 나직히 입을 열었다.
“널 좋아하고 싶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러길 원했어.”
“좆까, 이 새끼야. 그딴 해괴한 문장 나열하면서 내 인생에 들어오지 마.”
“그래…, 내가 너한테 금은보화를 줄 수는 없지.”
“…….”
“그러니 특별한 쾌감을 주겠어. 네가 갈구해 마지 않던 사랑을 줄 거다. 네 존재를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일 거라 자부할게.”
동석은 연빈의 등뼈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쓸어내렸다. 연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아무런 움직임도 하지 못했다. 존재의 인정.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 한 마디는 금단의 과실 같았다. 연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말씀을 듣지 말 걸, 잔업 따위 하는 게 아닌데, 클럽에 갈 것을.
연빈의 목에 동석의 입술이 닿은 순간 연빈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안 것이다. 그렇게 그의 목에 흔적이 남을 때까지 연빈은 숨을 쉬지 못했고, 동석은 그에게 숨을 주듯 입 맞췄다.
“조연빈. 나를 봐. 널 사랑하는 사람을 봐.”
연빈은 동석을 순순히 응시했다. 그리고 인상을 구겼다.
“고백으로 치환해 봤자 넌 추행범이야.”
동석은 충만한 만족감으로 미소지었다. 그렇게 나와 줘야지.